알아차림과 애도
안소연
미술비평가
*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바다를 처음 보았다고 하는 그는, 홀로 떠난 바다 여행에서 잊지 못할 어떤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때, 스무 살의 그는, 모든 살아 있던 것들이 소멸되어가는 폐식물원 안에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한 점의 그림을 상상했다. 폐허와 죽음의 문 밖에서 고요하게 일렁이는 바다가 어쩌다 그림이 되는 순간.
그리고 바다를 상상했다. 재현하지 못할, 그림이 될 수 없는, 저 비가시적인 바다 속 어둠에 대해 상상했다. 어둠의 크기, 어둠의 깊이, 또 어둠의 무게, 투명한 물이 어둠을 만들만큼 크고 깊고 무거우려면 얼마만한 헤아림이 있어야할까. 그는 처음 보는 바다 앞에서 창문 속 그림이 된 듯한 바다를 헤아리다가 바다 저 편, 수많은 이름들이 (혹은 말들이) 봉인된 수평선 아래의 물결을 상상 속에서 지어내 보려 했나 보다. 그가 말한다. 절대로 고정될 수 없구나.
* 바닷속 부유물처럼 마모된 것 같기도 하고, 퇴적된 것 같기도 하고, 용해된 것 같기도 하다가, 압축된 물리적 힘이 느껴지기도 하는, 뭔가 쉽게 헤아려지지 않는 것들로 그의 작업실은 가득하다. 헤아려지지 않는 것들, 저 바닥 한 가운데에, 기둥 뒤에, 천장에, 벽과 바닥 사이의 모서리에, 도무지 단번에 헤아리기 어려운 형상들이 스스럼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것을 매우 사적인 것들이라 말하고 싶었는데, 그와 나 사이에서 어떤 말 잘 하는 이가 끼어들었다면, 그렇게 사적인 것들이 그림이 될 수 있냐는 불평을 쏟아냈을 지도 모른다.
말라버린 꽃과 풀이 있다. 뿌리도 없고, 이렇다 할 색도 없는, 죽은 꽃들이 간신히 서있다. 그는 “죽은 나무에 물주기”라는 쓸모 없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의 영화 속에서 한 남자가 죽은 나무에 물을 주던 수수께끼 같은 행위를 가져다 그는 죽은 식물을 땅 위에 일으켜 세우고 돌볼 구실을 만든다. 죽은 꽃에 물을 준다고 그것이 되살아나지는 않겠지만, 그는 어떤 믿음을 보여준다. 물을 주는 행위, 그 평범한 일상의 돌봄 행위가 모든 것이 소멸하고 불타 버리는 최후의 순간까지 가장 인간다운 존엄을 되찾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아는 듯했다.
* 그는 가장 사적인 것, 자신의 신체가 직접 관계 맺는 대상들로, 예술적 상상력을 엮는다. 같이 밥 먹고, 씻기고, 잠자는 가족들과 현실 너머의 접촉을 시도한다. 그의 남편은 춤을 춘다. 춤을 배운다. 그는 춤을 추려는 사람을 그린다. 버려진 화판을 주워다 “춤을 추려는 사람”의 형상을 그린 그는, 그 사내의 소망, “우리 가족의 마음에, 자연의 소리와 냄새 풍경 살갗이 더 많이 새겨질 수 있도록, 우리의 신체가 조금 더 부지런하길 기도합니다.”라는 문장을, 천에 바느질로 새겨, 글과 천 사이의 내밀한 결속을 보여주었다.
그가 그린 <춤을 추려는 사람(남편-되기)>의 캡션에는, 그리기의 재료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버려진 화판에 모유, 연필, 색연필, 파스텔, 실, 아크릴 채색”이라고 적혀 있다. 버려진 화판에, 그는 (검은) 숲속에 둘러싸여 춤을 추려는 한 사내의 몸을 그렸다. 거기에 서늘한 푸른색 원이 붙어 있고 실이 길게 늘어져 있다. 모유, 그는 그리기와 채색의 재료들로 형상을 짓고, 자신의 몸에서 받아낸 모유로 화면을 덮었다. (일렁이는 바다.) 초현실적인 환상처럼, 어둠 속의 남자는 춤을 추는 부지런한 몸이 되기 위해, 백색의 공백을 향해, 더 근원적인 장소로 (사라져가듯) 전진한다.
그의 작업실에서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던, 도무지 헤아리기 어려운 형상들은, 큰 회화로서, 흐릿한 기억처럼 곧 눈 앞에서 사라질 것 같다. 그는 왜 이토록 허망하고 흐릿한 형상들을 그리고 또 그리다가, 마침내 형상으로부터 달아나는 자기 자신을 탓하게 할까. 그는 엄마의 꽃무늬 옷을, 사진 찍거나 복사해서 종이에 옮기듯, 무언가로 고정시키고 싶었을 테다. 계속해서 일렁이는 바다의 물결처럼, 그것이 봉인하고 있는 바다의 어둠처럼, 그 어둠이 소멸시키는 지상의 모든 형상과 언어들처럼, 그는 “엄마”를 온통 뒤덮고 있는 저 꽃무늬 옷의 한 자락을, 깊은 상실로부터 붙잡아 놓고 싶어, 복제하듯 여러 장의 회화로 옮겨 놓았다. 이 그리기의 행위는 자신의 상실감을 간신히 지연시키는, 애도와 우울 사이의 끝없는 지속을 보여준다.
<엄마 뒷모습>(2023-2024)에서, 그의 시선을 상상해 본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과 이파리가 아무 색조차 없이 흐릿하게 화면을 채우고 있는 이 그림에는 또 다른 윤곽이 그림의 깊은 공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나타나 내 눈에 선명해진다. 둥근 어깨, 무심하게 떨궈진 팔, 모든 무게를 봉인해 버리는 저 등과 허리, 어떤 몸을 알아차린다. 그는 다시 어떤 사람들과 대화하며, 자신의 몸에서 가장 소중한 곳이 어디인지 묻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손, 가슴, 무릎… 그는 사람들과 함께 그 몸을 흰 색 석고로 떠내, 현실의 어딘가에 자리를 내어준다. 그 소중한 것이 무명의 공백 하나쯤을 채울 수 있도록, 그는 최소한의 물질, 윤곽, 두께를 상상해낸다.
그의 작업실에는 유령 같은 말들이 소복하다. 누군가의 소망, 누군가의 과거, 누군가의 오늘에 대한 말들이 작은 웅얼거림처럼 곳곳에 뭉쳐있다. 허공에 흩어질 익명의 말들을 주워다가, 그는 연약한 물질들 위에 새겨 넣는다. 이러한 결속, 이름 없고 연약한 것들의 결속, 그가 사라지고 은폐되어 가는 존재들을 잠시 붙잡아 그것에 이름을 주고 자리를 내어주는, 작업의 방식이다. 합판 결을 따라 무심히 그림을 그려 나가다 보면 거기서 누군가의 꿈 속에서 펼쳐진 큰 산이 나타나기도 한다. 누군가의 꿈을 귀 기울여 듣다 보면 마음 속에 어떤 장면들이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떠오른다. 그는 그 흐릿함과 고요함을 알아차릴 현실의 감각을 좇는다.
* 그는 죽음을 생각한다. 삶에 자리하고 있는 죽음.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언어를 찾고,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릴 수 있는 것을 찾고, 죽은 줄 알면서도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그의 쓸모 없는 행위에 깃든 절망과도 닮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예술과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강박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죽은 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죽은 잡초와 그 죽은 나무를 옥상에 심어 두었다.
2015.12.08부터 2016.01.25까지, 49일동안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주고 드로잉 한 후, 사진을 찍고 영상으로 기록하였다.
이 겨울에, 그것도 뿌리가 잘려나간 죽은 나무, 혹은 죽은 잡초에게 물을 주고 드로잉을 반복 한다는 것은 이미 ‘실패’ 라는 걸 알면서도 가는 예술가의 태도와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게, 예술하는 행위, 실천, 수행, 이것은 절망을 버티며 다 타버린 글자들로 글을 짓는 무모와 예외를 동반한다. <폐가>(2012-2015) 연작을 그렸던 그는, <죽은 잡초를 심고 찾는 사람>(2017)을 그렸다. 죽은 화가의 버려진 종이 판넬을 가져다 그림을 그렸고, 그는 죽음, 이 세상에서의 사라짐을 생각한다. 그것이 그림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에 대한 알아차림과 그것이 삶에 보내는 일종의 애도, 의식인 것이다. 49일 동안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 그림을 그리고 기록하는 일은, 삶 속에서 그가 무언가를 애도하는 의식이었던 셈이다.
죽음, 가장 사적인 순간, 그것을 삶과 예술의 이유라고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한 사람. 그는 사라질 기억을 붙잡는다. 지워지는 기억, 실현되지 못할 소망, 그렇게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고 허공 속에 사라질 누군가의 “마음”을 애도하며, 그는 돌판에 글자를 새기듯 석고 판에 글자와 형상을 꾹꾹 새겨 넣는다. 손바닥만한 석고 판에는 고대의 언어처럼 쉽게 읽을 수 없는 글자와 형상이 새겨 있고, 그것은 단지 그러한 흔적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스스로의 명분을 가졌다.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2011)에서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손바닥에 글자를 새겨가며 각자의 존엄을 되찾았던 일처럼, 그는 까다롭고 무모한 이 애도의 절차들을 거치는 좁고 긴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삶 속에 자리한 예술적 실천의 존엄에 대해 묻는 듯하다. 이는 사적인 삶의 순간들을 예술의 가장자리로 가져다 놓고, 그 둘이 진솔하게 포개어지는 순간에 희미한 확신처럼 다가올 테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삶이며, 그것은 절망과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불확실한 여정 속에서 불탄 언어와 불가능한 형상의 잔해들을 건져 올리는 한 사람의 존엄을 되찾는 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