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바라보는 일

 

 

The SoSo 큐레이터 박이정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 이미지는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아이를 업고 봄 무렵 핀 꽃을 바라보는 엄마의 등. 화려한 노란색 꽃무늬 티셔츠를 입고 나의 아이를 업은 엄마. 그 이미지는 결국 나를 캔버스 앞으로 다시 데려다 놓았다.

 

2023년 무렵 시작된 박명미 작가의 ‘엄마 뒷모습’ 그리기는 이후 그의 작업을 움직이는 주요한 형상이 되었다. 작가가 처음부터 엄마를 작업의 전면에 세우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이 ‘엄마’, ‘여성’, 나아가 ‘한국 근대 여성의 표상’으로 읽힘으로써 정치적 발언으로 소비되거나, 시대의 희생양에 대한 연민으로 기울거나, 타자들의 담론으로 틀지어질 가능성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가 엄마의 등이었기에, 작가는 ‘엄마’라는 틀 밖에서 엄마를 바라볼 수 없다는 미안함과 함께 이 대상을 마주한다.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자신과 엄마에게 주어진 대가 없는 노동, 특히 다시 시작된 엄마의 가사와 돌봄 노동으로 향한다. 엄마는 가정을 돌보고 가장의 역할을 해냈고, 이제는 딸의 아이를 돌본다. 여기에서 박명미는 회화와 돌봄을 나란히 놓는다. 그림 그리기가 무용한 일로 여겨지듯, 가사와 돌봄 노동 역시 사회적으로 충분한 가치와 보상을 부여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 행위는 생산과 가치 창출이라는 자본의 논리 바깥에 놓인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기 전 박명미는 1년을 버틸 만큼의 돈을 모으면 레지던시에 들어가 작업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유목적이고 불안정한 생활이었지만 작가에게 미술은 자신의 삶과 사회적 현실을 연결하고 스스로를 지탱하는 기반이었다. 사회의 소외된 존재와 그들을 둘러싼 현실을 다루며 실제 삶과 작업을 일치시키고자 했으나, 출산과 육아, 그리고 아파트로의 이주는 기존의 작업을 지속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자본과 권력의 주변부를 다루던 작업 주제와 변화한 삶의 위치가 충돌하면서, 작업 내용과 자신의 현실 사이에 미학적·윤리적 모순이 발생했다. 이 시기 자신의 모유로 화면을 덮고 그림을 폐기한 행위는 변화된 삶의 조건 속에서 기존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갈 수 없다는 자각을 드러낸 상징적 단절이었다.

 

이후 아이를 돌봄 기관에 위탁할 수 있게 된 시점에 이르러 작가는 작업실로 복귀했고, 계속 아른거리던 엄마의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재출발은 연작 〈엄마 뒷모습(엄마-되기)〉(2023–2024)로 가시화되었다. 얼굴과 앞모습이 인물의 정체성과 감정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면, 뒷모습은 표정과 시선을 가림으로써 인물에 관한 정보 일부를 감상자로부터 차단한다. 화면 속 엄마의 몸은 감상자 앞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그녀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엄마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작가는 엄마를 인터뷰하고, 과거의 사진과 그에 덧붙여진 엄마의 글을 찾아본다. 이번 전시 《너는 나의 회화》(2026)에서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 ‘덕순’과 춤을 추는 동료 예술가 신경혜의 어머니 ‘영란’의 인터뷰와 사진을 작업의 재료로 참조한다. 그러나 사진과 기록물을 참조한 작품에서 ‘덕순’과 ‘영란’의 모습은 온전한 형태로 재현되지 않는다. 이목구비는 흐릿하게 번져 있거나 의도적으로 지워져 있다. 따라서 엄마를 대상으로 한 작업은 엄마를 재현하는 일이라기보다, 타인에게 접근하는 동시에 접근의 불완전성을 확인하는 과정에 가까워진다.

 

이 지점에서 박명미의 회화는 개인적인 기억에서 출발해서 기억을 매개로 타자와의 관계를 질문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작가는 엄마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바라보고, 인터뷰하고, 다시 그리지만 그 과정이 엄마를 완전히 알게 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료가 축적될수록 한 사람의 삶을 하나의 이미지나 이야기로 환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사진은 특정한 순간을 남기지만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을 보여주지 못하고, 기록은 사건이나 상황에 관한 정보를 남기지만 이를 둘러싼 관계나 이면의 감정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타자를 향한 접근의 불완전성은 박명미 회화의 형식적 특성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의 회화의 주요한 시각적 특징은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희끄무레한 회색조와 정돈되지 않은 채 머뭇거리는 필선이다. 형태는 또렷한 윤곽을 갖추기보다 안개 속으로 미끄러지듯 흐려진다. 대상의 명확한 재현이 유보된 자리에서 화면은 회색의 중간 지대에 머문다. 이 회색은 단순한 색채 선택이라기보다 이미지가 명확한 의미로 고정되는 것을 지연시키는 장치에 가깝다. 이러한 회색의 상태는 미술사학자 T. J. 클라크(T. J. Clark)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회화를 논하며 사용한 ‘Grey Panic’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클라크는 리히터의 사진 기반 회화에서 회색과 흐림이 사진 이미지의 명확성을 약화시키고, 대상이 하나의 의미로 확정되는 것을 유보한다고 설명한다. 박명미의 회색 역시 대상을 명료하게 규정하거나 하나의 의미로 고정하기보다, 대상의 붙잡을 수 없는 상태를 화면에 남긴다.

 

이러한 그의 작업 방식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번역’과 ‘반복’이다. 작가는 아이의 옹알이를 문자와 점자로, 남편을 비롯한 타인의 글씨를 자수로, 어머니의 기록물을 무용과 음향으로 번역한다. 음성을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탈락과 변형이 발생하듯, 타인의 서사를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타인이 남긴 선과 문장을 반복해서 따라 쓰고 옮긴다. 그의 반복적 필사는 타자를 자신의 언어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차이를 인정한 채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하나의 방식으로 볼 수 있다. 같은 대상을 반복해서 그리는 행위 역시 기계적인 되풀이가 아니다. 대상을 화면 가득 배치하거나 극도로 축소하는 변주는 작가의 기억 속에서 변화하는 대상의 크기와 그에 대한 감정적 거리를 가시화한다. 이처럼 박명미에게 작업은 하나의 완결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흔적을 반복해서 옮기고 번역하면서 의미를 끊임없이 다시 구성하는 과정이다.

 

이미지와 의미의 고정 불가능성은 지우고 다시 그리는 행위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박명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완성된 상태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기와 지우기의 반복을 거치며 이전 이미지의 흔적이 다음 이미지 안에 남겨진다는 점이다. 화면에서 지워진 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새롭게 그어진 선 역시 이전의 이미지를 완전히 대체하지 않는다. 현재의 형상 위에 과거의 흔적이 남고 그 위에 또 다른 선이 덧입혀지면서, 하나의 화면에는 이미지가 변화해 온 시간이 축적된다. 따라서 지움은 단순한 소거가 아니라 이전의 이미지와 현재의 이미지가 공존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된다. 박명미에게 반복되는 지움과 덧그림은 기억이 현재의 시점에서 계속 수정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화면에 남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매체의 측면에서도 박명미의 작업은 ‘드로잉’, ‘회화’, ‘설치’와 같은 고정된 범주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작가는 자수, 천, 퍼포먼스, 음성, 영상 등 서로 다른 재료와 매체를 오가며 작업한다. 이는 박명미가 기억을 사진과 기록물, 목소리와 글씨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전달되는 유동적인 존재로 다루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은 가족의 기록으로 남고, 가족의 기록은 한 시대의 생활상으로 확장된다. 따라서 하나의 매체만으로 기억의 여러 층위를 담아내기는 어려우며, 작업은 자연스럽게 다른 재료와 매체로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완성된 하나의 작품은 다음 작업의 재료나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하나의 작품이 끝난 자리에서 다른 이미지와 재료가 파생되고, 이전 작업에서 사용된 요소는 새로운 작업 안에서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그 결과 개별 작품 사이의 경계 역시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박명미의 작업은 독립된 작품들의 집합이라기보다, 한 작업에서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며 형태를 바꾸어가는 연속적 과정에 가깝다. 회화에서 시작된 이미지는 자수와 소리, 움직임과 사진, 글씨와 기록물 사이를 이동하며 새로운 형태로 변주된다.

 

이렇듯 박명미에게 재료의 선택은 단순히 표현의 범위를 넓히는 문제가 아니다. 실과 바늘, 종이와 천, 사진과 문장, 소리와 움직임은 회화를 보조하는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작업을 구성하는 주요한 매체가 된다. 근대 서구 미술의 제도적 위계 속에서 회화와 조각이 ‘순수 미술’의 영역으로 자리 잡는 동안, 자수와 바느질 같은 행위는 오랫동안 사적이고 장식적인 여성의 공예로 주변화되어 왔다. 박명미가 실과 바늘, 천과 종이를 작업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이러한 매체의 위계와 그 안에 담긴 가사 노동의 가치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특히 작가의 어머니가 방직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은 작가 자신의 바느질 행위와 연결되면서, 여성의 노동 경험을 전시장이라는 공적 공간으로 이동시킨다.

 

가사 노동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그 의미의 전환은 미술사적으로 익숙한 이미지를 전유한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과 걸레질하는 여자〉(2026)를 통해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12)에서 신체의 움직임을 분절과 중첩을 통해 화면에 구성하고, 리히터가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1965)에서 사진을 회화로 옮기며 흐림과 번짐을 통해 재현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박명미는 ‘계단을 내려오는 여성의 신체’라는 이미지에 ‘노동하는 어머니의 신체’를 겹쳐 놓는다. 중첩된 선과 흐릿한 형상으로 구성된 화면에는 나체의 어머니가 걸레질을 하며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나타난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몸을 숙인 어머니의 신체는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이삭 줍는 사람들〉(1857)을 연상시키는 한편, 일상의 유지와 관리 노동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미얼 래더먼 유켈레스(Mierle Laderman Ukeles)의 ‘유지보수 예술(Maintenance Art)’과도 연결된다. 박명미는 이처럼 미술사적으로 상징화된 여성 신체 이미지에 걸레질하는 여성의 몸짓을 겹쳐 놓음으로써, 움직임과 여성성, 재현과 시선의 문제를 가사 노동과 돌봄의 문제로 전환한다. 이때 걸레질은 단순한 행위의 묘사를 넘어, 오랫동안 사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었던 집안일을 회화의 주요한 형상으로 위치시키는 장치가 된다.

 

전시 제목 《너는 나의 회화》(2026)는 이러한 작가의 미학적·윤리적 태도를 집약한다. 작가에게 ‘너’는 어머니이자 가족의 구성원이며, 자신의 작업 안에서 마주해 온 이름 없는 타자들이다. 재현의 관계에서 ‘너’는 그려지는 대상, 즉 주체의 시선에 놓이는 객체로 위치한다. 그러나 박명미의 작업에서 ‘너’는 회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자, 회화가 계속해서 향하는 대상이 된다. 이번 전시 제목에 영감을 준 박소은의 곡 〈너는 나의 문학〉 속 “아니 그걸로 부족한데”, “안돼 이것도 부족한데”라는 노랫말처럼, ‘너는 나의 회화’라는 명제는 하나의 표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에 계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려는 태도로 읽힌다. 여기에서 ‘너’를 그리는 회화는 대상을 소유하거나 완결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너’에게 계속해서 다가가는 방식인 것이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다시 부르는 일. 완전히 기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다시 다가가 기억해 내는 일. 한 언어로 충분하지 않기에 다른 언어로 부지런히 옮겨보는 일. 사라진 존재를 완벽히 되돌릴 수는 없지만 희끄무레한 잔상으로나마 잠시 현재에 머물게 하는 일. 그리고 기억을 단적인 서사로 손쉽게 봉합하지 않는 일. 박명미의 회화는 이처럼 의도적으로 불완전성 안에 머문다. 그에게 회화는 무언가를 완전히 붙잡아 두는 일이 아니라, 완전히 알 수 없는 존재를 계속해서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그렇게 박명미의 화면 위에서 어머니의 뒷모습은 이제 개인의 초상을 넘어선다. 대상을 명료하게 재현하기를 거부하는 그의 작업은 사적 노동과 일상의 존재들을 회화의 중심 장소로 불러내는 윤리적 지향을 담고 있다. 엄마의 등에서 시작된 하나의 이미지는 그렇게 기억과 타자, 노동과 돌봄, 삶과 예술이 서로를 거듭 번역하고 위계를 전복하는 과정으로 확장된다.